이스라엘 유태인,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가면을 쓴 침략자의 감춰진 본질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딛고 일어선 이스라엘이 오늘날 팔레스타인과 이란에 행하는 군사적 만행의 본질을 파헤치고,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모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알아본다.
과거의 비극은 현재의 만행을 정당화하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기억 중 하나인 나치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유대인 학살은 수많은 영화와 문학의 소재가 되어 전 세계인의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2026년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중동의 현실은 그 슬픈 역사마저 무색하게 만든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이 세운 국가 이스라엘이 이제는 팔레스타인을 거대한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두고, 명분 없는 이란 공격을 통해 제3차 세계대전을 획책하는 발원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경악스럽다. 역사의 피해자가 가장 잔혹한 가해자로 변모한 이 비극적인 순환의 본질을 냉정하게 들여다볼 때다.

아우슈비츠의 눈물과 할리우드가 만든 '피해자 서사'
영화 쉰들러 리스트나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며 유대인의 고난에 공감하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인종 청소는 분명 인류 문명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오점이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과 굶주림 속에서 사라져간 수백만 명의 생명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며, 그들의 아픔은 기록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피해자 서사'가 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모든 정치적, 군사적 행동을 비판으로부터 방어하는 난공불락의 성벽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국가적 위기나 비판이 거세질 때마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내세운다 전 세계는 그들이 겪은 고통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자위권 행사는 묵인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 아래 있었다. 그러나 이 동의는 현재 그들이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인종 절멸에 가까운 행태 앞에서는 유효하지 않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타인의 생존권을 박탈할 권리를 부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텍스트로만 접하던 역사의 교훈이 현실에서는 철저히 왜곡되어 소모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피해자였기에 무엇을 해도 좋다는 식의 논리는 오히려 그들이 비판하던 나치의 광기와 닮아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방문했던 이들의 전언을 들어보면, 그곳에서 느끼는 숭고함 뒤에는 '다시는 당하지 않겠다'는 맹목적인 복수심이 서려 있다고 한다. 그 복수심의 화살이 엉뚱하게도 조상 대대로 그 땅에 살던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이 심리학적 기제가 국가 단위로 작동할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우리는 지금 똑똑히 보고 있다.

가자지구: 21세기에 재현된 거대한 강제 수용소
| 구분 |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 현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
| 통제 방식 | 물리적 장벽 및 가스실 | 고립 장벽, 드론 감시, 봉쇄 |
| 자원 제한 | 음식 및 의약품 통제 | 물, 전기, 연료, 구호물자 전면 차단 |
| 정당화 논리 | 인종적 우월주의 | 국가 안보 및 테러 대응 |
| 피해 대상 | 유대인, 소수자 등 | 팔레스타인 민간인 (여성, 어린이 포함) |
현재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상황을 보면 나치의 게토와 무엇이 다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거대한 분리 장벽으로 가로막고 생필품 반입을 철저히 통제하며 고사시키고 있다. 이는 명백한 민간인 학살이자 전쟁 범죄다. 하마스의 테러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수만 명의 어린아이와 여성들의 목숨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은 정밀 타격이 아닌 무차별적인 파괴에 가깝다.
전쟁터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과거 아우슈비츠의 그것과 공명한다. 병원과 학교를 폭격하고 구호 활동가들을 사살하는 행태는 히틀러의 SS 친위대가 보여준 잔인함 그 이상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팔레스타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지우려 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선 '인종 청소'의 영역이다. 국제사회의 중단 권고조차 비웃으며 폭격을 이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세계는 진정한 공포를 느낀다.
최근 가자지구 내부의 참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접하면, 부서진 건물 더미 아래서 자식을 찾는 부모들의 모습이 1940년대 바르샤바 게토의 기록 영상과 겹쳐 보인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가장 고통받았던 이들이 그 고통을 타인에게 그대로 재현하는 모습은 인류사의 가장 비극적인 반전이다. 이스라엘이 행하는 이 만행은 결코 안보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비뚤어진 선민의식과 증오가 만들어낸 괴물 같은 행위로 보인다.


명분 없는 이란 공격,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이스라엘의 도발
이스라엘의 광기는 팔레스타인 국경 안에 머물지 않는다. 최근 벌어진 이란에 대한 도발과 공격은 명분도, 정당성도 없는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이란과의 전면전을 유도하여 미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이려는 이스라엘의 전략은 전 세계를 핵전쟁의 위협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들은 중동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주권 국가의 영사관을 폭격하거나 민간 시설을 타격하는 행위는 국제법 위반을 넘어선 선전포고와 다름없다.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는 주된 명분은 '잠재적 위협'이다. 있지도 않은 핵무기 제조 가능성을 언급하며 선제 타격을 정당화한다. 이는 과거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를 침공하며 내세웠던 '대량살상무기'라는 거짓 명분과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본질은 다르다. 범죄자 네타냐후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내부적 정치 위기를 타개하고,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처지를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로 돌파하려 한다. 세계 경제와 에너지를 볼모로 잡고 벌이는 이 위험한 불장난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작고 약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의 골치덩어리'임을 증명한다.

이란 공격 이후 국제 유가는 급등하고 물류 대란이 현실화되고 있다. 평범한 전 세계 시민들의 삶이 이스라엘의 호전적인 행보 때문에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만행이 전 인류에게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오로지 시오니즘이라는 광신적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주변국을 초토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이런 행보를 보면, 과연 그들이 말하는 '평화'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그것은 타자의 죽음 위에 세워진 피의 평화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본질은 '피해자 서사' 뒤에 숨은 잔인한 '패권주의'다. 그들의 행동을 안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에는 이미 선을 넘었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악마화하며 학살을 정당화했듯, 이스라엘 역시 팔레스타인을 비인간화하며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과거의 슬픔을 무기 삼아 현재의 범죄를 가리는 그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전 세계는 더 이상 묵인해서는 안 된다. 나치 히틀러의 만행을 규탄하듯,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중동 전체에 행하는 만행도 동일한 잣대로 심판받아야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었을 때 그 잔혹함이 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중동의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라 칭하지만, 그 민주주의는 유대인만을 위한 배타적인 통제 시스템일 뿐이다. 이제는 이스라엘을 향한 맹목적인 지지를 멈추고, 그들이 저지르는 전쟁 범죄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이 흘리는 눈물과 이란의 전운이 감도는 하늘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이스라엘이라는 폭주 기관차를 멈추지 않는다면 인류는 또 다른 아우슈비츠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 이스라엘은 과거 홀로코스트 피해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벌이는 인종 절멸 수준의 만행을 정당화하고 있다.
- 가자지구의 봉쇄와 민간인 학살은 21세기판 아우슈비츠로 불릴 만큼 잔혹하며,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자 전쟁 범죄다.
- 명분 없는 이란 공격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국 이익만을 위해 세계 평화와 경제를 위협하는 지구촌의 골치덩어리로 전락했다.
-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위선적인 피해자 서사를 걷어내고 그들의 침략적 본질을 비판하며 강력한 제재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