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전유성 별세, 향년 76세, 프로필과 생애, 활동 연혁과 작품 회고
개그맨 전유성이 폐기흉 악화로 2025년 9월 25일 별세하였다. 향년 76세이다. 한국 코미디의 산증인이자 ‘개그맨’이라는 용어를 대중화한 인물이다. 전유성의 프로필, 가족(전부인 가수 진미령과 딸), 활동 연혁, 수상 내역, 작품 활동을 회고해 본다.
개그맨 전유성이 세상을 떠났다. 2025년 9월 25일 밤 9시 5분, 전북대병원에서 폐기흉 증세가 악화되며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한국 코미디의 초석을 다진 그는 ‘개그맨’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장본인이자, 수많은 프로그램을 기획·연출하고 후배를 길러낸 아이디어맨이었다. 방송인으로서, 기획자로서, 또 저술가로서 평생 대중과 함께한 전유성의 생애를 돌아본다.

전유성 프로필과 가족사
전유성은 1949년 1월 28일 서울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연출과를 졸업했다. 1968년 TBC 특채 코미디 작가로 방송에 입문했고, 이듬해 MBC 개그맨 겸 방송작가로 정식 데뷔했다. 그 후 본격 개그맨으로 활동하면서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 ‘개그콘서트’ 등 한국 코미디의 상징적인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가족사도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다. 전유성은 가수 진미령과 1990년대 초부터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으나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이들은 2011년경 사실상 결별했고, 외동딸 전제비 씨가 유일한 유족으로 알려졌다. 진미령은 빈소에 근조화환을 보내 애도를 표했다.

활동 연혁 – 한국 코미디의 산 증인
전유성은 평생을 ‘코미디의 현장’에 바쳤다. 1967년 연극 무대에 섰고, 1968년 방송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1970~80년대에는 ‘개그맨’이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키며 방송 코미디의 흐름을 주도했다.
‘유머 1번지’와 ‘쇼 비디오 자키’는 그를 코미디 기획자로 각인시킨 작품이다. 1990년대에는 라디오 DJ로도 활약하며 《지금은 라디오 시대》, 《여성시대》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방송보다 주로 지역 활동에 집중했다. 청도에 정착해 ‘코미디철가방극장’을 세우고 약 4,400회 공연을 이어갔다. 이는 “코미디는 삶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을 보여준다. 2019년에는 데뷔 50주년 공연 ‘전유성의 쑈쑈쑈’를 열며 코미디 인생을 자축했다.

수상 내역 – 방송인으로 남긴 발자취
전유성은 방송인으로도 많은 상을 받았다.
- 1994년 MBC 방송대상 라디오 MC 우수상
- 1997년 국무총리 표창
- 2000년 올해의 인터넷 연예인상
- 2004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 부문 우수상
또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상 등 지역문화 기여 공로로도 표창을 받았다. 상보다 더 값진 것은, 한국 코미디사에서 ‘개그맨’이라는 직업적 정체성을 확립시킨 기여였다.
전유성은 영화, 드라마, 광고, 라디오까지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 TV 코미디: KBS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 ‘개그콘서트’ 원안,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출연
- 드라마: 《단팥빵》 특별출연
-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교수 3 역), ‘너에게로 또다시’(도사 역), ‘별 볼일 없는 인생’(할아버지 역) 등 다수 특별출연
- 광고: 오리온 초코파이, 아이큐점프, 롯데 죠리퐁, 해태 고향만두 등 시대를 대표하는 CF에 얼굴을 비췄다.
- 라디오: ‘여성시대’, ‘지금은 라디오 시대’, ‘책마을 산책’ 등으로 대중과 소통했다.
전유성의 별세는 단순히 한 코미디언의 죽음을 넘어, 한국 대중문화의 한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의미한다. 그는 “개그맨”이라는 호칭을 정착시키며 직업적 자부심을 심어주었고, 방송 무대뿐 아니라 지방 소극장과 철가방극장을 통해 웃음을 생활 속으로 끌어왔다. 후배 개그맨들이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했고, 코미디를 ‘예술’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의 자유분방한 아이디어와 도전정신은 방송인뿐 아니라 문화 기획자, 작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향년 76세, 전유성은 떠났지만 그의 웃음 철학은 세대를 넘어 여전히 살아 숨 쉬며 후배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